phrasing

2024–2025
Rubato, 2024, Inkjet print, 92×69cm
최기원의 조각, 2024, Inkjet print, 40×30cm
목소리, 2024, Inkjet print, 60×45cm
정연웅의 카메라, 2024, Inkjet print, 40×30cm
김찬영의 사진, 2024, Inkjet print, 20×15cm
그의 아버지 김재욱, 2024, Inkjet print, 80×60cm
무제(하루), 2024, Inkjet print, 32×24cm
Fermata #2, 2024, Inkjet print, 32×24cm
배자한의 조각, 2024, Inkjet print, 44×33cm
Fermata #3, 2024, Inkjet print, 32×24cm
Swing, 2024, Inkjet print, 120×90cm
Fermata #1, 2024, Inkjet print, 105×70cm
Self-stufes-sphere, 2024, Inkjet print, 105×70cm
심나연, 2024, Inkjet print, 60×45cm
박영준, 2024, Inkjet print, 60×45cm

묵묵히 곁을 내어주며 일상을 공유하는 지인들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 이야기 속 자리한 것들이 궁금했다. 그러던 중 피아노 치는 친구를 만났다. 그는 연주를 시작할 때마다 피아노 위에 메트로놈을 올려두곤 했는데, 그 모습은 유독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연주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고, 음악 사이사이 끼어드는 메트로놈의 소리는 마음을 끌었다. “내가 메트로놈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내는 박자를 메트로놈에 견주어 연습하는 거야. 내 속도를 찾는 게 중요해” 그가 말했다. 이 말은 오래도록 마음에 머물렀다.

한 개의 추가 왔다 갔다 하며 움직임을 만들어내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파동을 만들며 나아간다. 메트로놈은 일정한 박자를 유지하지만, 음악 소리가 커지면 그 소리는 점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불현듯 어느 날, 그 순간이 떠올랐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정한 박자 속에서도 우리가 경험하는 순간들은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다고.

저마다 다른 음을 눌러가며, 때로는 그 음들이 어긋나며 각자의 속도와 리듬을 만들어가듯, 우리 역시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간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새벽이 언제 올지 모른다* 는 것은, 우리가 확신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도 문을 열어두는 태도를 유지하는 일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기다리는 태도, 혹은 다가올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이처럼 희망을 품는 일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경험하는 방법이다.

* "새벽이 언제 올지 모르기에, 나는 모든 문을 연다."
(에밀리 디킨슨, I Many Times Thought Peace Had Come, 1876)

Exhibition text

모처럼 들여온다

성실하게 선명해지는 겨울 잔가지. 작고 예민한 것들이 신경증처럼 모여있는 형상. 반쯤 옷을 걷어놓은 여성의 자세.
전시 <숨을 고르듯 날아가지는 세 작가의 공동 전시로, 이들이 숨을 고르며 신중하게 다가갔던 장면을 이 공간에 띄워본다. 취약한 생김새를 더듬어 담아낸 장면들은 불완전해서 여리고, 옅은 감정까지 끌어낸다. 조그맣게 나 있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겨울 볕을 바라보던 날처럼, 흐릿한 온 기가 여기까지 비쳐 든다. 어렴풋한 빛이 잠시 들어왔다가 나가는 순간을 연결이라고 불러본다.

흘러드는 공기와 희미한 빛으로 인한 반짝임이 오래도록 이곳에 남는다. 연약한 따뜻함이 손바닥 으로 전해진다. 그 따스함이 남은 자리를 거듭 어루만지며 조금 전 무어가 이루어졌었는지를 되새 겨본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던 발걸음을 문득 돌아보듯이.

김가은 작가는 바라봄이라는 행위를 사이에 두고 그 '사이'를 공동의 경험으로 채워낸다. 작가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인물은 풍성한 겹을 드러내며 투명하게 부풀어 오르고, 한 시기의 감각이 함께 소환된다. 그 리듬 속에서 작가의 음악은 뒤섞이고 혼재되며 고유한 <Phrasing>으로 재탄생한다. 리듬이 머물고 간 자리에 그 흔적으로 오브제들이 남는다. 창문은 어룽지고 사진에는 동그란 손가락 자국이 남으며, 식생은 온실 천장까지 자라있다. 단지 진정으로 믿는 사람에게만 믿음을 실현하게 하는 간절한 염원처럼 오브제는 무게감 있게 조명되며, 가까스로 걸쳐진 실오라기조차 존재감을 조용히 드러낸다. 함부로 믿어보고 싶을 만큼, 피부로 숨을 쉬는 것 같이 엷은 표정을 가진 인물들. 이들은 이완하여 기대어 있고 맞바람을 버텨주는 벽처럼 안정감이 있다. 그 장면에서 부터 이들이 수시로 번갈아 서로를 보살펴주기도 하리라는, 작품 뒤에서 순간적으로 형성되는 서사가 있다. 그 서사의 힘으로, 잠시 덮어두었던 살아감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내 삶을 재경험하게 한다.

전작 <어떤, 어떤 장면 에서 작가가 엄마와 자신 사이에 놓인 거리의 모호함에 관해 알아내고자 노력하였다면, 현 작품에서 작가는 그 '사이'를 다정을 믿으며 건너가 보려고 한다. 작품에서 빛은 어디 한군데 맺혀 있지 않고 그저 부드럽게 흘러 다니는 것 같으나 자연스레 시야가 걷혀있는 이 상스러운 간명함을 가지고 있다. 탁함의 간격을 투과해 오는 어렴풋하지만 지속되는 다정의 힘은 그것의 열렬한 시작을 상상하게 한다.

(…)

이들이 가만히 들여보내는 냉담하지도, 호들갑으로 열광하지도 않는 미지근하고 단단한 속삭임을 마주한다. 어스름한 입김과 숨, 속삭임들은 이 자리에 띄워져 있다. 새어 들어온다. 차츰 비쳐 드는 빛 조각이 바닥에 드리울 것이다. 덮어보려고 하는 손을 피하지도 않고 세모난 빛 조각이 옮겨간 다. 조각은 설명할 수 없이 부드럽고 그러나 만질 수 없는. 손등을 서서히 그리고 완전하게 뒤덮는다.

 

 

송윤선
서울예술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였다.